1. 왕세자로 책봉되다
성은 이, 휘는 혼(琿)이며,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위로는 친형인 임해군이 있다.
어릴 적, 친어머니인 공빈 김씨를 여의고, 선조의 냉대 속에서 자라왔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면서 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했다. 선조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으나,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다. 그러나 서얼이라는 열등감이 있었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다. 그러나 선조가 아끼던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그해 6월,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2. 임진왜란 활약 그리고 왕위
광해군은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권섭국사의 직위를 맡아 분조의 책임자로서 평안도 지역으로 떠났다.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등의 지역에서 군사를 직접 모집하고,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는 등 분조활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가서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 조달에 힘쓰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는 등국가 안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또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로 입적하여 세자로서 위치를 굳게 다지게 되었으나, 명나라에선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였고, 국왕인 선조는 자기 자신보다 위세와 민심이 좋은 아들 광해군을 심히 경계하였다.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데 반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 없다.
의인왕후가 사망한 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 책봉하고 싶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가 죽자 1608년,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3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608년, 왕위에 오른 후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고, 3년 후인 1611년에는 양전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창덕궁을 중건, 경덕궁,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궁궐 조성에 힘썼다.
3. 중립외교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여 국경 방비에 힘썼다.
1619년, 후금이 심양 지역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에 강홍립,김경서를 보내 명나라를 원조한다. 부차전투에서 조선군의 주요 병력이 괴멸하자 후금에 항복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통해 후금에 밀지를 전달하여 본의 아닌 출병 이었음과 전쟁을 원치 않는 다는 점을 후금에 알리는 실리외교를 펼쳐 후금과의 갈등을 잠재웠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점을 망각하는 배은망덕한 일이라며 서인들의 반발심을 샀다.
4. 인조반정 그리고 그 후
유영경의 세자 교체에 대해 적극 반대하고 나섰던 대북파는 광해군이 즉위함과 동시에 공로로 중용되었다. 즉위 초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북인에게 밀린 남인계 인사와 서인계 인사를 일부 등용하고, 소북파를 대북파 못지않게 대우하는 등 당쟁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으로 삼았고,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 능양군(훗날 인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죽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제거하였다. 1618년에는 이이첨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광해군의 이러한 처사들은 서인들의 반발심을 크게 불러왔고 결국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폐위 당하였다. 1623년 3월 14일 새벽, 서인들이 주도하고 남인들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발생한다. 이귀, 김류, 최명길, 김자점, 이괄 등과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훗날 인조)은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했다.
광해군은 폐위된 후 광해군은 폐비 유씨와 폐세자, 폐세자빈 박씨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폐세자 이질과 세자빈은 강화 서문 쪽에, 광해군과 폐비 유씨는 동문 쪽에 안치되었는데, 이질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붙잡혔고, 자결을 명받아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세자빈도 자결하였다. 다음 해 1624년, 폐비 유씨도 사망하고, 광해군은 이후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1641년 (인조 19년) 7월 1일에 67세를 일기로 독살로 인해 사망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두산백과
지식백과
'한국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역사 조선, 경혜공주 (1) | 2023.12.16 |
---|---|
한국의 역사 조선, 연산군 (1) | 2023.12.15 |
한국의 역사 조선, 태종 이방원 (0) | 2023.12.14 |
한국의 역사 조선, 인현왕후 (1) | 2023.12.12 |
한국의 역사 조선, 혜경궁 홍씨 (1) | 2023.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