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장자 이 융
1476년(성종 7년) 음력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장남 이융이 적장자로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후궁 출신 윤씨이며, 당시 성종의 눈에 들어 성종의 첫 번째 후궁이 되었고, 이어 연산군을 갖게 되면서 비로서 책봉되었다.
1483년(성종 14년) 연산군이 세자에 책봉되었고, 서연(書筵)을 통해 세자의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성종에게는 연산군 외에 정현왕후 소생 진성대군(훗날 중종)이 있었으나 성종이 승하할 당시에는 세자 이융(연산군)의 나이가 18세였으므로 대세를 피할 수 없었다.
후궁이 많았던 성종과 폐비 윤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윤씨가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문제로 후궁들과 인수대비는 윤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쫓아내고 만다. 때문에 연산군은 어려서 생모인 폐비 윤씨가 아닌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다.
1494년, 아버지인 성종이 죽자, 왕세자의 자격으로 조선의 제10대 국왕 자리에 올랐다.
2. 왕위 즉위 후
연산군은 즉위 초 비융사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애를 썼다.
연산군의 즉위 초기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을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고, <국조보감>이나 <여지승람> 등 여러 서적을 완성 시켰으며 세자시절 스승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즉위 초반에는 경연에 자주 참여하는 모습 또한 보였다. 연산군은 선왕의 명복을 비는 행사인 수륙재 거행과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즉위 1년 후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망하게된 사건의 전말을 알게된 후 방치된 폐비 윤씨 능묘 천장두고 삼사와 대립하였다.
즉위 이듬해,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시키는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림파에서 '사후 백년간 폐비 윤씨 문제는 논외에 부친다'는 성종의 유언을 핑계로 폐비 복권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시작하였다.
3. 무오사화
재위한지 4년만인 1498년 7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의 내용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판하고 붕당을 만들어 국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조의제문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연산군은 김일손은 물론 관련된 많은 사림파를 잡아들여 국문하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 하고 많은 신진 사류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훈구파 고관들은 이 기회를 통해 중앙정치에 대거 진입한 사림파를 일망타진 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 사건으로 국왕과 갈등을 빚었던 삼사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또한 말미암아 김종직, 김일손이 대표적인 영남사림파는 몰락하였고 훈구파의 세상이 찾아왔다. 무오사화였다.
4. 갑자사화
1504년 음력 10월 연산군 재위 10년, 훈구파 내부간 궁중파와 부중파의 분란이 발생했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언을 이유로 폐비 복위를 반대했고, 궁중파는 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사림파는 물론이고 모든 반대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했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를 숙청한 뒤, 폐비 문제와 직결된 부중파도 숙청하고 이미 죽은 대신들은 부관참시 하였다.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두 후궁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는 정씨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시켜 때려 죽게 하고,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어 산야에 버리고 절대 매장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했다. 안양군과 봉안군을 유배 보냈다가 이듬해 죽였고, 정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유배 보냈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두 거두어 불태웠으며, 성균관의 유생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곳에서 황음에 빠지는 등 연산군의 만행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선발해 들인 흥청들과 그들의 식비, 유흥비 등으로 국가 정사가 피폐해진다 하여 흥청망국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곧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었다.
5. 폐위
1506(중종 1) 음력 9월 2일, 훈구파를 중심으로 성희안, 박원종 등은 사병들을 모아 신수근, 임사홍 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궁궐을 장악하여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으니 훗날 중종이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의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 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다. 유배지의 별감과 상궁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그는 이를 묵묵히 참고 인내했다. 유배 중 연산군은 폐사자 황이 사사 됐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괴로워했다. 연산군은 유배된 지 2개월만인 그해 음력 11월,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향년 31세였다.
사망 후 그의 묘소는 강화도에 안장되었으나 1512년 12월 강화도에 홍수가 일어나 묘소가 침식되었다. 폐비 신씨의 요청으로 1513년에 양주군 노해면 해등촌(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의정궁주 조씨 묘소 윗편에 이장되었다.
연산군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에 한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가 잇따라 일어나 선조 이후 정치 세력들이 붕당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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