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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조선, 희빈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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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옥정

 

 

 

 

 

 이름은 옥정, 본관은 인동이며,  역관 출신 아버지 장형과 어머니 파평 윤씨의 막내딸이.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숙인 장현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이었으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할머니인 남포 박씨는 산학 별제 박심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윤성립은 일본어 전공의 사역원 첨정 종 4품이었으며, 외할머니 초계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 변승업의 당고모였다. 언니는 관상감 관원 김지중과 혼인하였고, 오빠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1680년에 내금위에 재직 하였다. 

 

 

 

 

 

 

 

 

 

2. 입궁하다.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희빈 장씨가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뽑혀 입궁 하였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때 궁중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680년 10월 26일(숙종 6년),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인경왕후 김씨가 죽은 뒤에 희빈 장씨는 숙종에 눈에 들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같은 해,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복창군 이정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장옥정의 출궁 직후 1681년 1월 3일, 계비 간택령이 내려졌고, 두달 후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 송시열의 추천으로 인현왕후 민씨가 간택되었고,  그 해 5월 14일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가 가례를 올렸다. 

 

 

 

 

 

 

 

 

3. 왕비가 되다.

 

 

 

 

 

 

1683년, 숙종이 천연두를 앓았는데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는 인현왕후 민씨와 숙종의 쾌차를위해 무당의 지시대로 절식을 하고 매일 속옷 차림으로 냉수욕을 하며 치성을 올리다가 감기에 걸렸는데 숙종이 아직 병상에 누워 있어 쉬쉬하다가 대비 명성왕후 김씨의 상태가 더 나빠졌고, 숙종이 다 낫기도 전인 12월 5일에 사망하였다. 1685년 12월, 대비 명성왕후 김씨의 3년상이 다 치뤄진 후에야 희빈 장씨는 궁에 다시 들어올 수 있었다.

궁으로 돌아온 희빈 장씨가 숙종에게 총애를 받자 서인과 인현왕후 민씨가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인현왕후 민씨는 영빈 김씨를 간택 후궁으로 입궐시켰고 숙의에 봉해졌다. 얼마 후에 숙종은 영빈 김씨를 소의로 진봉하였으 또 얼마 뒤에는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한 김씨를 계속 진봉 시킨 것은 서인을 향한 일종의 견제 장치였다. 숙종은 중궁전과 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희빈 장씨의 거처를 새로 마련하였다. 같은 해 12월, 숙종이 희빈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하였다. 

1688년, 소의로 승격한 희빈 장씨는 같은 해 10월 28일, 왕자 윤(훗날 경종)을 낳았고, 다음 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이 되었다. 

숙종의 장남 윤을 원자 책봉 하는데에 있어 대신들의 말이 많았는데, 1689년 ( 숙종 15년) 2월 1일에, 인현왕후 민씨의 외가인 송시열이 원자 정호를 철회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크게 분노하여 송시열을 벌하라는 명을 내렸으나,서인으로 가득찬 승정원은 이를 행하지 않아였다. 이에 숙종은 사간원, 삼사, 승정원 등 요직에 있던 서인을 모두 쫓아내고 경신환국 때 실권했던 남인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물러나면서 인현왕후 민씨는 폐비되고, 1689년(숙종 15년) 음력 10월 22일,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4. 그 후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물러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고, 취선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희빈 장씨 측의 주장이긴 하나 희빈 장씨는 세자 윤의 쾌유를 위해 신당을 설치하고 굿을 벌였다. 인현왕후 민씨와 함께 노론이였던 또 다른 후궁 숙빈 최씨(훗날 영조의 생모)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하여 굿을 하였고 이로 인해 민씨가 병을 얻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숙종실록에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내용은 없다.

1701년 10월 7일, 숙종은 빈어에서 후비(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다음날 10월 8일에 승정원을 통해 희빈 장씨에게 자진의 명을 내렸다. 10월 10일, 결국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사망하였다. 향년 43세였다.

아들 윤은 (훗날 겨종) 왕위 즉위 후 2년 뒤인 1722년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지식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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