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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조선,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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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산

 

 

 

 

 

 

 

성은 이, 휘는 산,  호는 홍재다. 1752년 10월 28일,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영조다. 형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 후 모든 장례를 치룬 

형 의소세자가 3살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고 3년 후인 1759년(영조 35년), 세손으로 책봉 되었고, 1762년 2월엔 좌참찬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와 혼인 하였다.

1762년(영조 38년) 7월,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에 죽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직전 무겸선전관 이석문이 어린 세손인 정조를 등에 업고, 궐내로 들어왔다. 어린 정조은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줄 것을 청했으나 강제로 끌려나갔고, 어린 정조의 간절한 청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2. 세손의 대리청정

 

 

 

 

 

 

1764년 2월, 영조가 정조를 죽은 자신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종통을 잇게 하였다.

정조는 존현각에서 서연을(경연) 열어 열심히 학문에 임했고, 주변 누각들에 책을 두어 도서관으로 삼았다.

정조는 무예 특히 활쏘기를 학문 못지않게 즐겼는데, 정조의  즉위 이후의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10번이 넘게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론 벽파가 당론으로 세손이었던 정조를 제거하려 하자 세손은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며 지내야만 했다.

1775년(영조 51년), 영조가 노병으로 국정을 살필 수 없게 되자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그러자 당시 좌의정이자 외척인 홍인한이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고, 화완옹주의 양자로 권세를 부리던 정후겸과 결탁하자 정조와는 척을 지게 되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 벽파는 정조 즉위 후 자신들의 입지가 두려워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한 것이다. 영조는 혼인한을 파직시킨 후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3. 성덕임

 

 

 

 

 

 

성덕임(의빈 성씨)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친정집 청지기의 딸이었다. 성덕임의 아버지 성윤우가 나랏돈을 횡령하자 성덕임을 가엾게 여겨 혜경궁 홍씨가 1762년 자신의 처소의 궁녀로 삼고 양녀처럼 길렀다. 1766년 15세때 정조는 당시 한 살 어렸던 성덕임에게 승은을 내렸으나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한것을 염려하며 거절했다. 15년 뒤, 정조가 재차 승은을 내리자 성덕임은 또 다시 거절하였다. 정조는 성덕임의 시속을 벌주었고, 결국 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이게 된다. 정조는 의빈 성씨가 죽은 후에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치제문>등을 작성하였고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여러번 사용했다.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는 아들 문효세자가 있다.

 

 

 

 

 

 

 

 

4. 업적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시행한 탕평책을 계속 이어왔다. 또한 규장각을 설치하였는데, 재위 5년째인 1781년, 규장각을 확대 개편하였고 왕정 수행 기구로 삼았다. 이에 박제가, 유득공 등 서얼들을 검서로 등용하였다.

정조는 초계문신제도를 두어 규장각에서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능력있는 젊은 인재를 키우기 위함이였는데, 37세 이하의 문신들을 교육시켜 나라에 이바지할 인재들로 꾸려나가기 위해서였다.

새롭게 장용영을 세우고,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 강시 제도도 함께 시행하여 친위군영의 운영 기초로 삼았다. 정조는 〈병학통〉을 직접 지어 군사 훈련을 중요시 하였고, 직접 훈련 감독과 군사 지휘를 하기도 했다. 30명으로 시작한 장용영은 수원으로 진영을 옮긴 뒤 18,000 명까지 늘어났다. 또한 백성들이 억울하고 부당하게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영조 때 시작된 형정의 쇄신을 이어 재위 2년째에 형방승지를 의금부 형조에 보내 기준을 어긴 형구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하고, 그 기준을 <흠휼전칙>에 담아 각도에 배포하였다.

1785년(정조 9년), 정조는 <경국대전>과 영조의<속대전>을 통합하여 법전을 발간하였는데 <대전통편>이다.

체제공이 건의한 금난전권 폐지를 받아들여 신해통공 실시를 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부작용이 생기는 등 결국 이도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근처에 수원화성을 축조하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거중기를 고안하게 하여 화성을 완성시키는데 일조하였으며 이곳에 행궁과 장용영 외영을 두었다. 

 

 

 

 

 

 

 

 

5. 마지막

 

 

 

 

 

 1794년(정조 18년), 종기가 점점 번지기 시작하여 정조의 상태가 매우 악화되었다. 1800년 음력 6월 28일, 결국 일어나지 못한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조의 능은 건릉이다. 현재는 효의왕후와 합장되어 경기도 화성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

두산백과

위키백과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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