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위에 오르다.
휘는 혈,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와 한확의 딸 소혜왕후 한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침착했으며, 학문을 좋아했고,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매사냥을 자주 했다고 한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죽게되자, 작은 아버 예종이 즉위하였으나 예종 마저도 즉위한지 1년만에 승하하였다. 예종에게는 적장자가 있었고, 성종 본인에게도 2순위인 친형이 있었지만 이들을 제치고 성종이 즉위하게 된다. 성종의 장인 어른인 한명회와, 왕실 어르신 정희왕후 윤씨의 도움으로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서 1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것이다. 즉위 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첨정을 함으로써 국정을 다스렸다. 1476년 1월 9일, 성종은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신주를 받들어 종묘에 안치 하였고, 성종이 예종의 양자가 아닌, 의경세자(덕종)의 친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함을 확실시하였다.
2. 성종의 여인들
1467년(세조 13년), 성종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 한씨와 혼인했으나, 공혜왕후 한씨는 1474년(성종 5년)에 18세의 나이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476년(성종 7년), 봉상시 판사 등을 역임한 윤기견의 딸 제헌왕후 윤씨(연산군의 생모)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제헌왕후 윤씨(폐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후궁을 찾자 질투와 다른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인수대비의 화를 샀고, 1479년 제헌왕후 윤씨는 왕비에서 폐출, 폐비 윤씨가 되었다. 이에 폐비 윤씨가 원자(연산군)의 어머니임을 이유로 다시 복위 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고 사망하게 된다. 이후 성종은 윤호의 딸 정현왕후윤씨를 다시 계비로 맞이하였다. 훗날 중종의 생모이다.
3. 정치적 행보
성종은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그 중 장인 한명회의 도움도 있었기에 즉위하고도 몇년은 신숙주, 한명회 등 9명의 원로 대신들이 원상으로서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국정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1476년(성종 7년) 성종이 직접 국정 운영을 하게 되면서 김종직과 같은 사림파들을 조정으로 불러오기 시작하여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성종은 사찰을 없애는 등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법령의 정비에도 힘써 유교적 통치 질서의 기반을 세웠다. 1474년 (성종 5년), 세조 때부터 이어온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으며 1492년에는 경국대전을 보충한 <대전속록>, <동국여지승람>, <오례의>, <악학궤범> 등 여러 서적을 편찬 및 간행하였고 세조때 없앤 홍문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1479년(성종 10년), 윤필상을 시켜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년 (성종 22년)에는 허종을으로 하여금 두만강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북방 방비도 놓치지 않았다.
4. 마지막
성종은 동물을 매우 좋아하여 사슴과 강아지, 고양이 등을 데려다가 기르기도 했다. 1494년, 성종은 각종 질병으로 인해 병석에 눕게 되었고, 이때 생긴 종기로 인해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즉위한지 25년째인 1494년 음력 12월 24일, 각종 합병증으 38살의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릉에 2계비 정현왕후와 함께 안치되어 있다.
성종은 폐비 윤씨 사건을 자신이 죽은 뒤,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 일은 훗날 피바람을 몰고 오게된다.
출처
위키백과
지식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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