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방원 조선을 세우기까지
1367년 (고려 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이 , 휘는 방원, 자는 유덕이다. 1383년 (고려 우왕 9년) 17살이라는 나이에,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 부인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1388년 (고려 우왕 15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정조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아버지를 도와 기존의 고려를 유지하려는 세력의 제거에 힘을 썼다.
1392년 (고려 공양왕 4년) 3월,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 낙마하여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부름으로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고 그동안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하자며 이성계 설득에 나섰지만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며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당부하였고, 이후 설득하고자 부른 정몽주와 마주앉아 시를 주고 받았다. 이때 서로 주고받은 시조가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此亦何如彼亦何如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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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 <하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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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를 회유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결심한다.
1392년 (고려 공양왕 4년) , 이방원은 무사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왕위에 오르자 이방원은 정안군에 봉해졌다.
2. 이방원 왕위에 오르기까지
이방원은 포은 정몽주를 대낮에 살해하면서 아버지 이성계에게 큰 노여움을 샀고, 조선 건국 뒤에는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을 뿐, 정도전, 남은 등 과도 갈등하며 결국 왕세자에는 책봉되지는 못 하였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보다 신권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 라며 신권을 주장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선택하였다.
이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다. 1398년,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과 이화, 사촌 이천·처남 민무구, 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이방번, 세자 방석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제 1차 왕자의 난이였다.
이때 이방원은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이방과에게 사양하였다. 태조의 둘째 아들 이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1400년 (정종 2년) 넷째 형인 이방간이 박포와 결탁하고 공모하여 이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방원이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방간과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이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대신들 가운데 일부가 동모제(同母弟)를 세자로 삼은 전례가 없다며 왕태제(王太弟)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종은 동생 이방원을 아들로 삼겠다며 왕세자로 책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책봉된 지 9개월 만인 그 해 11월, 이방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
3. 왕이 되고 난 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일원화하고,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새로히 정비하여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의흥부를 폐지하여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또 문하부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낭사는 사간원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는 사평부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를 신설하였으며,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를 정비하며 점차 국가를 안정시켜갔다. 1405년에는 의정부의 서무를 육조에서 분장하게 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더욱이 왕권을 강화하기에 나섰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여진인) 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썼다. 또 주자소를 세워 1403년(태종 3년) 계미자를 만들었으며,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사찰들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나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도참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힘썼다. 또한 호패법을 실시하여 양반과 관리, 농민들까지 모든 백성이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태종 이방원은 1402년 (태종 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또 정적을 색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고,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인 의금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로 역모 방지를 위한 기관이었다. 이처럼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 강화를 위해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4. 그 후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이자 태종의 장인인 민 제는 개국 공신이었고, 이방원의 네명의 처남 모두 제1, 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을 도와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장인 민 제의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세자인 양녕대을 지지하였고,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결집하자 태종 이방원은 장인과 처남들을 제거하였고 그의 처가는 몰락했다. 태종의 장남인 왕세자 양녕대군은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겨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논의되자 효령대군은 더 열심히 학문에 힘썼으나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였다.
1418년 6월, 태종은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함과 동시에 양녕대군 장인도 함께 유배지로 보내리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왕세자 충녕대군은 훗날 세종대왕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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