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조선, 소현세자

반응형

 

 

 

 

 

 

 

 

 


 

 

 

 

 

 

 

 

 

 

 

 

 

 

1. 청나라에서의 삶

 

 

 

 

 

 

 

 

성은 이, 이름은 왕이며, 시호는 소현(昭顯)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재위 1623~1649)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의 형이다. 인조 3년, 정월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1627  (인조 5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전주로 피신하였으며, 그해 말에 참의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전주로 피신하였을 때에 이원익, 신흠과 함께 분조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고, 전쟁이 끝나자 인조를 호위하여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듬해 동생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이 피난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인조와 함께 성 밖으로 나왔다.

그 후 1637년,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의 항복의 예를 올리며 항복하자 조청화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으로 세자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 부부, 주전대신들과 인질로 끌려갔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가 조선을 많이 압박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또한, 청나라에 함께 끌려온 조선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이 애썼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와 같이 여러 정치적, 경제적 안건을 맡아 처리했다.

1644년 (인조 22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머물면서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샬(Adam Schall)과 교류하며  그를 통해 로마 가톨릭, 천문서, 천주상등  서양 문물들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소현세자가 서양의 문물들을 조선에 보급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였는데, 이는 아담샬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드러나있다.

 

 

 

 

 

 

 

 

 

 

2. 아버지와의 갈등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와 대신들은 이런 세조의 태도에 많은 비난을 보냈고, 1645년(인조 23년) 음력 2월에야 억류에서 풀려나 겨우 귀국했음에도 서학을 보급해 발전에 힘을 쓰려던 소현세자를 핍박하였다. 소현세자는 1640년(인조 18년)과 1644년(인조 22년)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조선에 돌아왔을 때를 빼고 9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3. 세자의 죽음과 그 이후

 

 

 

 

 

 

 

1645년 (인조 23년) 음력 2월, 9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4월 26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월 26일에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고양의 소경원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족실록>에는 소현세자의 병세가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염습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1645년 청 순치 2년) 6월 27일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었으며, 그 후에도 증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매일 세자를 진료한 기록에 따르면 세자가 앓고 있던 병이 추론이 가능하며 그 병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인조는 세손 이석철이 있는데도,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대신들이 반대를 했는데도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고,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년)에는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렸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간소화했고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고종때 세자의 묘를 봉원토록 하는 제도를 통해 소경원으로 격상되었으며, 인조 는 소현세자 사망 후 세자를 폐위시키고 폐세자라고 칭하다가 이 또한 고종때 세자로 복권되었다.

 

 

 

 

 

 

 

 

 

 

 

 

 

 

출처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최근의 인기 드라마 연인을 통해 당시 조선의 상황과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영화 올빼미도 소현세자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담고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