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원했던 아들
1. 사도세자
영조의 둘째 아들, 훗날 영조의 뒤를 이은 왕 정조의 아버지로도 잘 알려진 사도세자. 아내는 혜경궁 홍씨로 한중록으로도 유명하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한 임오화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임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임오옥(壬午獄)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노소당인(老少黨人)들의 정쟁(政爭) 과정에서 노론에 의해 세자가 희생된 것이다.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안타깝게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고, 42세의 고령에 사도세자를 낳았다. 또한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도 당시 40세였다. 당시를 생각하면 아주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인 셈이다. 영조 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실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元子)'로 정했고, 이듬해인1736년 (영조 12년) 에는 이제 막 돌이지난 원자를 정식 왕세자로 책봉한다.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의젓하고 총명해 3살 때 영조와 대신들 앞에서 <효경(孝經)>을 읽고 ‘천지왕춘(天地王春)’이라는 글자를 썼다고 전해진다. 9세 때(1743년) 영조가 직접 홍봉한의 딸을 간택해, 이듬해 세자빈으로 책봉했다. 영조는 장조를 총애했으며, 어려서부터 후계자로 엄격히 교육하려 했다. 그리고 세자가 15세 때인 1749년에는 대리청정을 하며 본격적으로 후계자로서의 경험을 쌓게 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세자 대리청정은 순탄치 못했다.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 소론 등 당파 간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이면서 몸이 쇠약해졌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조선왕조실록>과 <한중록> 등에는 세자가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었으며, 심리적 압박 때문에 새 옷을 갈아입지 못하거나 가슴 통증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 질환도 앓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엇갈림의 시작
당시 돌던 홍역으로 사도세자의 바로 위 동복누나인 화협옹주가 20세에 요절했다. 화협옹주도 사도세자처럼 아버지에게 미움받는 처지라, 둘은 만나면 "우리 남매는 아버님 귀 씻을 물이다."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영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으면 귀를 꼭 씻었는데, 귀 씻은 물을 사도세자나 화협옹주의 처소 쪽 방향에다 버리게 했다고 한다. 화협옹주가 죽은 지 2주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영조가 선위를 하겠다고 하자, 사도세자는 각별했던 누나를 잃고 홍역에서 나은 직후의 성치 않은 몸으로, 1752년 12월 8일부터 19일까지 장장 열흘 가까이 다시 한 번 눈밭에서 석고대죄를 해야 했다. 1755년 11월 세자의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이에 세자가 마땅히 선희궁이 기거하던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으로 병문안을 갔는데, 동복 여동생인 화완옹주도 그곳에 있었다. 사도세자와 화완옹주 모두 영빈 이씨의 소생이기에 문안 오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예뻐하는 딸의 곁에 세자가 가까이 간 것을 본 영조가 폭발했다. 영조는 "당장 나가라!" 라며 호통을 치고 길길이 날뛰었고, 동생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사도세자는 창문과 담벼락을 넘어 허겁지겁 자신의 처소로 달아났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동궁을 나와 청휘문 안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꾸짖은 다음에 "서경의 태갑편이나 읽으라"고 명령하며 세자궁을 나갔고, 이에 세자도 폭발했다. 세자는 "아무 잘못 없이 이런 일을 당하니 서러워서 약을 먹고 자결하겠노라"고 하며 크게 울부짖다가 주변인들이 달래서 겨우 진정했다.
3. 사도세자의 죽음
세자와 영조의 관계는 1761년 서명응, 윤재겸의 상소로 세자가 영조 몰래 20일 동안 관서지방을 다녀왔으며, 동교에 집을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영조는 그 기간 동안 세자궁인 창덕궁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을 모두 처벌했다. 그리고 1762년 음력 5월 22일에는 궁궐에서 변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형조에 고발한 나경언을 영조가 직접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경언이 세자가 저질렀다는 10조목의 비행을 적은 문서를 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문서는 폐기되어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761년에 은전군 이찬과 청근현주의 생모인 수칙 박씨를 때려서 죽인 것, 여승 출신의 가선이라는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 궁중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액속의 무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전 상인들의 물품을 거두어들였을 뿐 아니라 액속들이 위세를 빌어 상인들에게 행패를 부린 일 등이 고발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음력 5월 24일에 직접 흥화문으로 나아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거두어들인 빚을 갚아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음력 윤5월 13일(7월 4일)에는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을 명령했다. 세자는 자결하려 했으나 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영조는 세자를 세자의 자리에서 내쫓고 서인(庶人)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고,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고변한 내용을 전하며 그를 뒤주에 가두었다. 다음날에는 세자를 시위하던 환관 박필수와 여승 가선, 서읍의 기녀 다섯 명을 참수했다. 뒤주에 갇힌 장조는 8일째인 음력 윤5월 21일(7월 12일)에 사망했다.
4. 사후
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그에게 다시 세자의 호칭을 회복시켜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러 음력 7월 23일에 양주의 배봉산에 매장했으며 묘호(廟號)를 수은(垂恩)이라고 했다. 사도세자의 장례식에는 영조가 백관과 함께 직접 무덤으로 행차해 신주에 글자를 썼다. 다음날 영조는 세손인 정조를 후계자로 삼아 동궁으로 부르게 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정조는 1777년 왕위에 오른 뒤에 아버지인 장조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높이고, 묘의 봉호도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쳤다. 1789년에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묘의 봉호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뒷날 고종은 1899년 장헌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현륭원의 명칭은 융릉(隆陵)으로 고쳤다.
출처
지식백과
두산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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