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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조선,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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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수리의 아들

 

 

 



영조는 조선시대의 제 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24~1776년으로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래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1699년(숙종 25년) 연잉군에 봉해졌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무수리였던 관계로, 노론 유력자인 김창집의 종질녀로서 숙종 후궁이던 영빈 김씨의 양자 노릇을 하였다. 1721년 숙종이 승하하고 왕세자가 즉위해 경종이 되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았고 또 후사가 없었다. 이에 노론측은 앞서 숙종 말년에 좌의정 이이명의 독대에서 논의된 대로,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착수하였다. 정언 이정소의 세제책봉상소를 계기로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 노론4대신의 요구와,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왕실의 최고 존장자인 대비 김씨의 삼종혈맥(三宗血脈)논리의 지원을 받아, 연잉군이라는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왕위에 오른 직후 영조는 앞으로의 탕평책 시행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붕당의 폐해를 들어 붕당타파를 선언 하였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에서 오는 신분 콤플렉스가 있었고,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와, 심지어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마침내는 왕으로서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무신란까지 겪었다. 이런 환경 탓인지는 모르나 영조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성격장애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자녀에 따라 극단적인 애증을 나타낸 것이 이를 말하며, 이것이 결국 사도세자의 울화병을 유발하고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했다고도 말해진다.










 

2. 균역법





조선 후기 군정의 문란으로 돈 있고 세력 있는 양인은 관리와 결탁하여 군역을 면제받고, 무력하고 가난한 양인만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군포를 보충하기 위해 이미 사망한 군역 대상자에게도 그 몫을 가족에게서 징수하는 백골징포, 16세 미만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던 황구첨정, 군포 부담자가 도망하면 친척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던 족징, 이웃이 도망가면 이웃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군포를 징수하던 인징 등 갖은 비법이 횡행하였다. 1750년(영조 26년) 종래 인정(人丁) 단위로 2필씩 징수하던 군포가 폐단을 일으키고, 농민 경제를 크게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하기로 함과 동시에 균역청을 설치, 감포에 따른 부족재원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하게 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전세,염세,선세 등을 균역청에서 관장하여 보충한다는 등의 균역법이 제정되어 1751년 9월에 공포되었다.
균역법은 1750년 왕이 친히 홍화문에 나가서 백성을 만나서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의지를 보인 것에 대해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가 있다.











3. 탕평책






선조와 광해군 시기에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졌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다. 조선 후기엔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졌으며, 정조가 즉위한 뒤에는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졌다. 탕평책은 조선 영조 때, 붕당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책이다. 1729년에 영조는 기유처분을 하면서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편다. 소론계의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서명균 등과 노론계의 홍치중, 김재로, 조도빈 등으로 이루어진 탕평파들 중심으로, 노 · 소론간의 연합정권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탕평 정국이 실현되었으며 이 바탕 위에서 영조의 왕권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4. 사도세자







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는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왕세자로서의 도량과 덕을 겸비하여 영조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리청정에 임하게 되면서 세자는 행동에 형평을 잃고, 비정상적인 성격이 나타나 영조로 하여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영조가 세자를 참살한 또 다른 계기는 1762년 5월에 세자의 실덕과 비행을 고발하는 나경언의 무고 사건과 문소의등의 부자간의 이간책 등이 작용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결국 무더운 여름, 영조는 아들인 이 선을 뒤주에 가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사도세자는 세자가 사망 한 뒤에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
지식백과
나무위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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