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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조선, 세자빈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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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자빈

 

 

 

 

 

 

 

본관은 금천, 1611년 (광해군 3년) 4월 18일, 우의정 강석기와 어머니 신예옥 사이에서 5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귀주 대첩에서 큰 활약을 보인 고려시대의 장수 강감찬의 18대손이다. 

1627년 (인조 5년) 12월 4일, 정묘호란이 발생한 해에 17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2 27일에 소현세자와 혼인을 치뤘다. 전란 직후임을 감안해 본래 보다 검소하게 치뤘다고 한다.

이후 1629년부터 1644년까지 소현세자와의 사이에서 4남 5녀의 자식들을 출산하였다.

 

 

 

 

 

 

2. 인질로 잡혀가다.

 

 

 

 

 

1636년 (인조 14년) 12월 14일,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왕실은 피난을 결정하였고 세자빈 강씨는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37년 (인조 15년) 1월 26일, 강화도가 함락하였다. 이후 1월 30일, 국왕인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였다. 이에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세자빈 강씨와 부군인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 부부까지 함께 볼모로 심양에 끌려갔다.

 1640년(인조 18년), 청 태종 홍타이지가 소현세자에게 20만평 가량의 땅을 강제로 주면서 이제부턴 알아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살라하였다. 이에 세자빈 강씨는 심양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비용을 지불하고 데려와 농장에서 일하게끔 하였다. 당시의 청나라는 유목을 하는 민족이였기에 농사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청나라에서의 농사의 번영은 세자빈 강씨가 주도해 이끌어 나갔다. 강빈과 소현세자는 심양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 경영수완을 발휘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다. 이로 인해 얻은 이익으로 청나라 고관들과 교류하거나 외교활동을 하는데에 밑천이 되었다. 청나라에서 적응하며 교류하는 모습에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을 등에 업고 자신을 몰아낸뒤 왕위에 오를까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매우 불신하고 견제하였다.

 

 

 

 

 

 

 

 

3. 그녀의 억울함

 

 

 

 

 

 

 

1643년(인조 21년), 세자빈 강씨의 아버지 강석기가 사망하자 심양에서 잠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불신과 견제로 인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빈소에 왕곡조차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1645년 (인조 23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청나라에서의 길었던 인질생활을 마치고 고국인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인조의 반응은 더욱이 냉담하였고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의 이간질까지 더해졌다.

그토록 밟고 싶었던 조선 땅에 온지 2달만인 1645년 (인조 23년) 4월 26일, 부군 소현세자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귀국하는 길에서부터 그다지 건강한 모습은 아니였지만, 죽음을 맞이한 소현세자의 모습은 약물에 중독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독살이 아니냐는 의문도 있었다. 인조는 서둘러 소현세자의 장례를 치뤘고, 세자에게 시침한 소용 조씨의 사람이었던 어의 이형익에게 별다른 벌도 내리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해, 인조는 강빈과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두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남편 소현세자가 죽은 뒤, 강빈은 인조의 모략 계획에 휘말린다. 

 

 

 

 

 

 

 

 

4. 그 이후

 

 

 

 

 

 

1646년 (인조 24년) 1월 3일, 인조가 식사를 하려던 중 수라의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조는 이를 대외로 알리지 않고 내시를 통해 자체적인 조사를 하였다. 인조는 강빈을 의심하여 세자빈의 궁녀들을 잡아 고문 및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모진 고문에도 그 누구도 불복하지 아니하였다. 뒤늦게 이를 알게된 신하들의 요청에 인조는 의금부로 하여금 조사하게끔 하였으나 별다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강빈의 궁녀들 중 많은 이들이 고문사 하였고, 1646년인조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빈을 폐출하여 사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1646년(인조 24년) 2월 9일

 

 

 

1646년 (인조 24년) 3월 15일, 36살의 강빈은 결국 시아버지 인조에게 사약을 받고 사망하였다.

이후 인조는 소현세자와 강빈의 아들이자 자신의 어린 손자들을 유배보내었고, 이후 이 중 셋째 경안군만이 살아남아 효종때에 되어서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인조 이후 봉림대군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도 정통성을 위해 세자빈 강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1654년 (효종 5년) 황해감사 김홍욱이 억울하게 죽은 강빈의 신원 회복경안군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이를 듣지 않고 김홍옥을 국문 끝에 장살로 죽였다.

1718년 (숙종 44년) 4월 8일, 강빈과 소현세자에 대한 숙종의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송시열과 그 외에 많은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죽은지 72년 만에 세자빈에 다시 복위 되었고 민회빈으로 추증되었다.

 

 

 

 

 

 

 

 

 

 

 

 

 

 

 

참고출처

지식백과

두산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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