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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조선, 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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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왕

 

 

 

 

 

휘는 환, 자는 대양. 1534년 (중종 29년)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중종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1539년 (중종 34년) 경원대군에 책봉되었다.

이복 형 인종이 즉위한지 1년만에 후사가 없이 갑작스레 죽자, 인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인종이 즉위할 당시 윤임 중심의 대윤은 권력을 잡는가 하더니 갑작스러운 인종의 죽음으로 금방 사그러들고 만다. 즉위 당시 명종의 나이는 고작 12세였기 때문에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첨정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문정왕후가 국정을 운영하게 되자 소윤 윤원형이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대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2. 어머니의 힘

 

 

 

 

 

소윤 윤원형파는 윤임이 중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를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소문을 내고 그 일가를 숙청함과 동시에 그들을 따르는 일파 또한 유배보내거나 제거하였다. 문정왕후는 윤임과 유관 등을 제거하고 이언적과 중종의 아들 봉성군 등을 유배시켰다. 이어 자신들과 대립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숙청하였다. 마지막 사화 을사사화다.

2년 뒤인 1547년, 여주가 나라를 망친다며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벽서사건이 일어난다. 문정왕후는 남은 대윤 세력들을 숙청하였고 소윤 윤원형의 기세는 더욱 강해져 갔다. 

외척의 힘이 더욱 거세지자 백정 출신 임꺽정이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탐관오리를 죽이는 일들이 발생했고, 1555년에는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겪어온 왜인들이 배 60척과 함께 전라도 지방을 침입한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이에 1510년(중종 10년)에 발생한 삼포왜란 때 설치된 임시기구 비변사가 상설기구가 되었다.

1553년, 어머니 문정왕후의 수렴첨정이 끝났다. 직접 국정을 돌보게 된 명종은 세력이 강해진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처외숙부 이량을 이조판서에, 이량의 아들 이정빈 이조전랑으로 등용했다. 그러나 왕의 힘을 얻고 횡포를 부려 자신의 조카인 심의겸에 의해 숙청당했다.

 

 

 

 

 

3. 마지막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기 전까지 명종은 자신의 힘을 보이지도 못하고 왕권의 기반도 다지지 못한채 어머니와 윤원형의 기세 속에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1565년,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고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윤원형을 내쫓는 등 좋은 뜻을 펼치려 시도하였으나 1567년 음력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사망하였다. 명종은  인순왕후와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세자가 13세에 죽고,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양자로 입적하여 왕의 계보를 잇게 하였으니 다음 왕인 선조이다.  

묘호는 명종, 시호는 공헌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이다.

능은  강릉으로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해있다. 

 

 

 

 

 

천성이 자효하고 공근하였으며 본디 문예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비가 수렴첨정하게 되었으므로 정치가 외가에 의해 좌우되었다.그리하여 많은 간사한 이들이 득세하여 선량한 신하들이 많이 귀양 가거나 살해되었으므로 주상의 형세는 외롭고 위태로웠다.
친정한 뒤에도 오히려 외척을 믿고 환관을 가까이하여 정치가 날로 문란해지더니, 끝내는 다행히 깨달아서 이량 윤원형의 무리를 내쳤으므로 국가가 다시 안정되었다.

 

<명종실록> 3권 총서

 

 

 

 

 

 

 

 

 

 

 

 

 

 

 

 

 

 

출처

위키백과

지식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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